본문 바로가기

닷컴's_골방/Uzbek

우즈베키스탄 역사 일반

1. 고대 역사

오늘날 중앙아시아 지역에는 이미 4000년 전에 청동기 문화가 출현하였으며, 수로를 이용한 관개 농경이 보급되었다. 당시 이 지역은 박트리아, 소그디아나, 호레즘의 일부였고, BC 6세기에는 고대 페르시아의 영토였다가 BC 4세기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되었다. 고대 중앙아시아의 원주민들은 페르시아인들과 같은 이란계 민족으로서 자랴프산 계곡의 고대 소그드인이나 아무다리야 강 하류에 거주하던 호레즘인들이었다.


서역(西域)이란 중국 사람들이 한나라 때부터 현재의 중국 서부지역인 신장 지방 일대를 일컫는 명칭이었다. 한의 무제(BC 140-87)는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월지와 동맹하기 목적으로 장건을 서역에 파견하였다. 장건은 월지(현재 사마르칸드 주변)를 찾아 대원, 강거(키르기즈), 이란 등을 탐사하였다. 무제는 장건이 보고한 '피 흘리는 천마(汗血馬)'를 구하기 위해 이광리 장군을 중앙아시아에 원정보내기도 했다.

 

2. 봉건사회

 

알렉산더가 세운 박트리아 왕국은 인도에서 일어난 쿠샨 왕조에 의해 멸망되었으며, 쿠샨왕조는 다시 에프탈리테에게, 에프탈리테는 돌궐에 의해 멸망하였다. 돌궐제국은 고대 투르크족 지도자 부민(Bumin)을 중심으로 서기 545년에 성립하였다. 부민의 사망후 아들 무칸(Muqan)과 이스테미(Istemi)가 동서로 나누어 돌궐을 지배하였는데, 동돌궐의 지배자가 전체 돌궐제국을 대표하였다. 그러나 돌궐제국은 내부 분열과 중국 수나라와의 충돌에서 패배하고 당나라에게 반세기 동안 지배를 받게 되었지만, 683년 쿠툴루그 일테리쉬에 의하여 제2의 돌궐제국(후돌궐)이 성립되었다.


6세기 중엽 돌궐제국이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면서 칸을 세습하는 봉건 제도를 구축하였지만 왕권세습이 명확히 확립되지 않아 왕권을 둘러싼 부족간의 갈등이 빈번하였다. 서돌궐의 주민들은 정착 농민과 유목민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대부분의 농지는 개인적인 부를 지닌 지주 대칸에 종속되어 있는 소작인 케디버에 의해 경작되었다.

 

3. 이슬람화

 

8세기 아랍인들은 호라산 총통 이븐 무슬림의 지휘하에 중앙아시아에 진입하여 호레즘을 정복하고 이슬람을 전파하였다. 사마르칸드, 타쉬켄트, 코칸트, 부하라 등지가 이슬람교의 중심지가 되어 동서무역의 중계지로 번성하였다.


당나라는 8세기 중엽 고구려 출신의 고선지(高仙芝) 장군을 중앙아시아에 파견하여 서역 경영을 본격적으로 시도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아랍-투르크 동맹군이 당-위구르 연합군과 탈라스 강변에서 무력충돌하였다. 여기에서 아랍-티베트-카를룩 연합군 승리로 끝나게 됨에 따라 중국은 서부 스텝 트란스옥시아나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이후 중앙아시아 지역은 투르크계 이슬람 세계가 되었다.


서투르크족은 이슬람의 정주국가로 셀주크 제국을 건설하여 중동과 페르시아의 이슬람 보호자로 군림하였다. 셀주크 제국은 사만조를 도와 카라한조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투우룰을 술탄으로 추대하여 성립되었다. 그러나 방대한 영토를 관할하던 셀주크는 내부 분열이 일어나 아나톨리아, 시리아, 키르만, 호라산으로 4분되면서 쇠퇴하였다. 셀주크 제국의 본거지인 호라산 지역은 호레즘이 계승하였다가 1243년 몽골에 의해 패망하였다.

 

4. 칭기스칸의 침입과 차가타이 한국

 

칭기스칸은 아시아 이슬람 세계의 패자 호레즘과 교역하려고 파견한 사절단이 살해되자, 이것을 계기로 서정(西征)에 올랐다. 몽골 군대는 오트랄·부하라 등의 도시를 공략하였고, 제베와 수부타이가 인솔한 별군(別軍)은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를 카스피해의 작은 섬으로 내몰아 굶어 죽게 하였다. 이후 중앙아시아 지역은 칭기즈칸의 둘째 아들 차가타이에 의해 계승되어 차가타이 칸국이 건립되었다.


차가타이는 아버지에게서 4,000명의 군대를 얻고, 칸국의 영지 비시발리크에서 사마르칸드에 이르는 천산의 계곡지대를 받아 가지고 본영을 일리 분지의 알말리크에 두었다. 1301년 차가타이가는 여러 아들이 서로 분립하여 권력을 다투다가 마침내는 천산 방면에 거점을 둔 동부 칸가(汗家)와 서부 투르키스탄에 웅거한 서부 칸가의 동서로 분열하였다.


서부에서는 투르크화한 칸국의 귀족들이 권력을 다투자, 그 중에서 티무르가 나타나서 서부 칸가를 평정하고 1369년에 티무르 제국을 건립하였다. 차가타이 한국은 조직화된 국가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정주지대(定住地帶)의 통치를 하였는데, 특히 징세는 토착민인 이슬람교도의 대관이 행하였다. 서부 한가는 14세기초부터 투르크 이슬람화하였으나, 에센 부카를 시조로 하는 동부 한가는 모구리스탄 한국으로 불리며 몽골의 유목적 생활전통을 유지하기도 하였는데, 16세기초까지 천산 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5. 티무르 제국

 

14세기 후반, 차가타이 칸국의 신하였던 티무르가 사마르칸드에 도읍을 정하고 티무르 왕조를 세웠다. 티무르는 본디 투르크인이었던것 같으나, 스스로 칭기스칸의 자손이라 일컫고 몽골 제국의 부흥을 내세우며 사방을 정복해 나갔다. 그리하여, 일 칸국이 무너진 뒤, 혼란에 빠진 이란과 이라크 지방을 아우르고 14세기말에는 차가타이 칸국, 킵차크 칸국까지 정복하여 세 칸국의 대부분을 손아귀에 넣었다. 이어, 북인도와 소아시아까지 정복한 그는, 1402년 오스만 투르크의 군대를 앙고라 전투에서 격파하고 바야지드 1세를 사로잡았다. 그 후, 티무르는 원나라를 멸망시킨 명나라를 정벌하러 가던 중 갑자기 병이 나서 죽었다.


티무르가 이란인과 투르크인이 사는 지역을 통일함으로써 이란-이슬람 문명이 중앙아시아로 전해져, 투르크-이슬람 문명이 성립하게 되었으며, 사마르칸드는 그 중심지로서 번영하였다. 티무르 제국은 티무르가 죽은 뒤에도 얼마동안 몽골 제국의 서반부를 지배하였는데, 결국 내부 분쟁이 일어나 망하고 말았다. 티무르 제국이 망한 뒤, 이란고원에는 사파비 왕조가, 그리고 중앙아시아에는 부하라 칸국, 히바 칸국, 코칸트 칸국 등이 일어났다.

 

6. 우즈벡 민족 형성

 

14세기 후반 킵차크 칸국이 분열하여 그 일족 샤이바니가 아랄해 북방의 초원지대에 정권을 수립하였을 때, 그의 밑에 모인 투르크계 및 투르크화한 몽골 유목민 집단을 우즈벡이라고 스스로 불렀다. 샤이바니(Sheibani) 칸은 이들을 이끌고 서(西)투르키스탄에 침입하여 샤이바니 왕조를 세우고, 그 뒤 부하라 칸국·히바 칸국·코칸드 칸국을 세워 근세 중앙아시아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후에 우즈벡이라는 민족명은 스텝에서 이주한 부족들뿐만 아니라 우즈베키스탄 현지 부족들을 통칭하는 것으로 되었다. 우즈벡인들은 호레즘, 소그드인, 마사케트인, 사카인 등 중앙아시아 고대 이란계 원주민들을 기저층으로 하여 투르크족이 발전하여 형성된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우즈벡인들이 세운 부하라 칸국은 사마르칸드 지역에, 히바 칸국은 아무다리야 하류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코칸트 칸국은 페르가나 지역을 장악하였다. 부하라 칸국은 1753년 마그니트(Magnit)조에 의해 설립되고 하이다르(Haydar: 1800-1826) 재위 기간 동안에 칸국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히바 칸국은 호레즘 지역의 계승 왕국으로서 18세기 우즈벡 제후들에 의해 통치를 받았다. 코칸트 칸국은 페르가나의 봉건 제후 알림 칸(Alim Khan)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들 세 개의 칸국은 상호 불신과 반복 대립하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진출에 공동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또한 유목 민족적인 전통이 뚜렷이 남아 있는 투르크계 부족들은 민족 공동체 의식이 극히 부족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자기 부족성에 두고 있었다.


우즈벡 민족이 중앙 집권적 민족주의로 발전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몽골 침입에 있었다. 몽골은 호레즘 샤 통치하에 형성되었던 중앙 집권적인 강력한 통치 체제를 파괴시켰으며, 중앙아시아를 여러 봉건적 지방 세력으로 분할하였다. 이와 같이 분할된 중앙아시아는 사회 경제적인 면에서나 정치적인 면에서 매우 낙후된 결과를 초래하였고, 끓임없는 부족간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 악화와 농업과 수공업의 쇠퇴 현상을 초래하여 중앙아시아의 민족 공동체 발전 및 민족 단일체로의 발전에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7. 러시아 식민 통치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진출은 이반 4세가 카스피해 북쪽에 위치한 아스트라 칸국을 정복하면서 시작되었다.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정복을 본격화한 것은 1855년 크림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서방에서 잃은 러시아 제국의 자존심과 군사적 명예를 회복하고 중앙아시아 장악을 통한 경제적 이익 확보라는 목적과 중동과 서남아를 장악한 영국의 중앙아시아 진출을 견제하려는 국제 정치적인 이유가 크게 작용하였다. 러시아의 알렉산드 2세는 코칸트(1875), 부하라(1873), 히바(1873) 등지의 소공국을 정복했고, 1881년에는 카스피해까지 점령하였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짜르 정권이 붕괴되자, 중앙아시아의 투르크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주의 정당 투르크 연방당을 설립하여 통일 국가 설립을 위하여 투르키스탄 자치 정부를 수립하였지만 볼셰비키는 이를 반혁명 부르주아적 민족주의라고 비난하고 강제 해체하였다. 본격적인 중앙아시아 저항운동은 페르가나 지방에서 일어난 바스마치(Basmachi: 침입자, 무법자라는 뜻)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바스마치 운동은 러시아 소비에트 제국에 대한 저항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근대화세력에 대한 저항, 기독교 정교에 대한 이슬람 종교 세력의 저항이었다. "원주민을 위한 중앙아시아"라는 구호 아래 안디잔에는 이르가쉬 벡(Irgash Beg)이, 페르가나에서는 마다민 벡(Madamin Beg)이 저항운동을 주도하였는데, 이르가쉬 벡은 민족주의와는 상관없는 보수적인 철저한 이슬람 신봉자였고, 마다민 벡은 민족주의적 개혁주의자였다.


바스마치 운동은 1918년에 마다민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등 활발하게 전개되었지만 프룬제 소비에트 군대가 페르가나 지역을 재탈환하고 내부 분열로 패망하였다. 그 후, 오스만 터키 장군이었던 범투르크주의(Pan-Turkism)의 기수 인베르 파샤(Enver Pasha)가 바스마치 운동을 지휘하면서 새롭게 전개되었다. 오스만 황실의 사위였던 파샤는 전통적으로 오스만 제국 황제를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로 알고 있던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에게 성스러운 존재였으며, 또한 그가 개혁당 청년 투르크당의 지도자였다는 것이 민족주의 세력이 그를 중심으로 모여들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정부의 이간 정책으로 바스마치 지도자들간의 파벌 투쟁이 심화되고 마침내 파샤가 1922년 전쟁에서 사망함으로써 범투르크주의 운동은 실패로 귀결하였다.


1924년 볼셰비키는 중앙아시아 소비에트 공화국들은 민족 거주 지역에 따라 민족 단위 국가로 재편성하였다. 4개의 투르크계 공화국과 한 개의 이란계 타지키스탄 공화국이 설립되었으나 인구 구성은 여전히 혼합적이고 다민족적 성격을 띄었다. 모스크바는 투르크 각 민족의 독립성이나 개별성을 강조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중앙아시아 투르크 민족국가들의 연합을 꾀하는 범투르크 민족주의 기반을 흔들어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소련 정부의 소수 민족에 대한 이중적 태도, 문화적 자치는 쉽게 문화적 민족주의로 변모하였으며, 이것은 후에 정치, 종교상의 분리주의를 초래하였다.

 

8. 우즈벡 독립국가의 형성

 

1985년 고르바쵸프의 등장으로 각 공화국들이 주권선언 및 독립선언을 하고, 마침내 1991년 12월 13일 소비에트 연방이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우즈벡인들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인들은 소비에트 기간 동안 이슬람이라는 이유로 종교적으로 탄압을 받았으며, 경제적으로 소비에트 체제에서 착취당하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속히 독립을 추구하였다.


독립을 추구한 우즈벡의 정치 성향은 세 개의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투르크 민족주의로 지식층이나 권력층의 일부가 이를 지지한다. 본래 투르크 민족주의는 오스만제국 말기에 터키에서 다민족 국가 오스만제국에 대하여 투르크 민족국가 건설을 목표로 청년 투르크당이 내세운 이념이었다. 그러나 우즈베키스탄 독립 이후 갈수록 이 노선은 호소력이 떨어지는데, 그 이유는 현재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투르크 민족의식보다는 우즈벡, 카자흐 등 개별 민족문화가 강조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우즈벡에서도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은 탄압 받고 있다. 또한 현재 가장 심각한 문제인 경제문제에 대해 터키가 현실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 노선이 확산되지 않는 이유이다.


둘째, 우즈벡 민족주의이다. 현재 중앙아시아의 지도자들은 과거 구공산당 출신으로서 온건파 민족주의자들로 볼 수 있다. 이들은 터키를 모델로 현대적 세속주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슬람은 개인의 종교가 되어야 하며 국가 정체성의 기초는 민족주의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우즈벡은 역사적으로 민족 국가 형성의 계기가 없었으며, 민족 정체성 형성에도 많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실체적 이념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로 하다. 우즈벡은 민족 정체성을 16세기의 아무르 티무르와 위대한 우즈벡 시인 알리세르 나보이에게서 찾고 있다.


셋째, 이슬람 국가주의 그룹이다. 이들은 국민의 대다수가 무슬림임을 들어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란처럼 이슬람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다 과격한 그룹은 우즈베키스탄의 와합주의자들로서 그들은 혁명을 통해 이슬람 국가 건설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을 우회적으로 지원하는 이란은 이란계 아프간과 타지크에 영향을 행사하기 위해 민중운동을 통해 이슬람 세력 확장을 기도하고 있다. 그러나 타지크에 어느 정도 성공한 듯한 이슬람 정권은 러시아와 우즈벡 군대의 진입으로 실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