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지(高仙芝/?~755)
고구려 출신의 당(唐)나라 장수로서 고구려가 망하자 아버지를 따라 당나라 안서에 가서 유격장군(遊擊將軍)에 등용되고, 20세 때 장군에 올랐으며, 안서절도사(安西節度使)의 신임을 얻어 740년경 천산산맥 서쪽의 달해부(達奚部)를 정벌한 공으로 안서부도호(安西副都護)에 승진하고, 이어 사진도지병마사(四鎭都知兵馬使)에 올랐다.
747년 토번(吐蕃:티베트)과 사라센제국이 동맹을 맺고 당을 견제하려고 동진(東進)하자,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에 발탁되어 군사 1만을 인솔, 파미르고원을 넘어 사라센제국과 동맹을 맺은 72개국의 항복을 받고 사라센제국의 동진을 저지, 그 공으로 좌금오대장군동정원(特進兼左金吾大將軍同正員)이 되었다. 750년 제2차 원정에 나가 사라센과 동맹을 맺으려는 타쉬켄트(石國)를 토벌하고 국왕을 잡아 장안에 호송한 공로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으나, 장안의 문신들이 포로가 된 타쉬켄트 국왕을 참살했기 때문에 이듬해 서역 각국과 사라센이 분기하여 연합군을 편성, 탈라스의 대평원으로 쳐들어왔다. 이를 막기 위해 다시 7만의 정벌군을 편성, 제3차 원정에 나갔다가 크게 패하고 후퇴하였다. 755년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정토군 부원수로 출전, 선발군으로 나가, 패전한 우군을 구원하기 위해 방어 담당지역을 무단이동한 사실에 대하여, 평소 사원을 품고 있던 부관이 과장하여 밀고함으로써, 진중에서 참형되었다.
고선지의 대서역 원정로는 현재 중국 신강성의 쿠차와 카쉬미르 파미르 고원을 넘어 타슈쿠르칸, 와캉강, 달코트, 키르기즈를 정복하였다. 서양의 역사학자 스타인(Stein)은 이것을 나폴레옹의 알프스 돌파에 비유하였다.
티무르(A. Timur : 帖木兒/첩목아/1336~1405.2.19)
중앙아시아 티무르제국의 건설자(재위 1369∼1405)로서 처가의 가계는 칭기즈칸으로 연결된다. 티무르는 서차가타이 한국(汗國) 카잔의 딸을 정비(正妃)로 삼았기 때문에 크레겐이라 불리고, 또 시스탄전투에서 오른발을 다쳤기 때문에 '티무르 이랑(절름발이 티무르)'이라고도 불렀으며, 유럽인은 Tamerlane이라 불렀다. 티무르는 이처럼 투르그크이었던 것 같으나, 스스로 칭기스칸의 자손이라 일컫고 몽고 제국의 부흥을 내세우며 사방을 정복해 나갔다. 1369년 바르프에서 즉위하고, 1370년 마와란나하르의 군주가 되어 사마르칸드를 수도로 정하였다. 그 후 티무르는 해마다 사방으로 원정하여, 1380년에는 호레즘을 병합하였고, 5회에 걸쳐 동차가타이 한국에 침입, 1397년에는 이를 복종시켰다. 이란 지방에 대해서는 80년에 카르토 왕조를 멸망시키고, 1393년에는 자라일 왕조의 군주 아마드를 바그다드에서 몰아냈다.
한편, 킵차크 한국의 토크타미시와 다투어 1395년 테레크 강변에서 이를 크게 격파하고 모스크바 부근까지 진군하였다. 1398년에는 인도에 침입하여 델리를 점령하고 많은 재화를 약탈하였다. 이 때 오스만투르크의 바야지트 1세는 이집트의 맘루크왕조와 결탁하여 아마드를 도와서 서경(西境)을 위협하였기 때문에, 군사를 시리아에서 아나토리아로 진군시켜, 1402년 7월 앙카라전투에서 바야지트를 격파하고 그를 포로로 잡았다. 마지막으로 그는 원제국을 멸망시킨 명나라를 정벌하려고 떠났으나, 도중 오트라르에서 병사하였다. 사마르칸드에 있는 구르 아미르는 그의 무덤이며, 1941년 그 유적이 발굴되었다. 대담·용맹하고 의지가 강하며 준엄하였지만, 또한 학자, 문인을 보호하고 산업을 장려하기도 하였다.
티무르가 이란인과 투르크인이 사는 지역을 통일함으로써 이란-이슬람 문명이 중앙아시아로 전해져, 투르크-이슬람문명이 성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마르칸드는 그 중심지로서 번영하였다. 티무르제국은 티무르가 죽은 뒤에도 얼마동안 몽고 제국의 서반부를 지배하였는데, 결국 내부 분쟁이 일어나 망하고 말았다 (1500년). 티무르 제국이 망한뒤, 이란고원에는 사파비왕조가, 그리고 중앙아시아에는 부하라 한국, 히바라한국 등이 일어 났다.
우즈벡 칸(Uzbek Khan : 1282~1342)
킵차크한국 제9대 군주(재위 1312∼42)로서 토글룰르자의 아들이다. '원사(元史)'에는 '月卽別'로 기록하였다. 제8대 토크타칸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바투 사라이에서 베르케 사라이로 수도를 옮기고 그곳에 이슬람 교회와 궁전 등을 세웠다. 상업·수공업을 발전시켰으며, 이슬람교를 장려하고 이집트 맘루크왕조와 우호관계를 맺는 등 킵차크 한국의 말기 최성기를 이룩하였다. 러시아 제후(諸侯)를 압박하였고, 일한국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원(元)나라와는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
울르그벡 (Uleg-bek : 1394—1449)
티무르의 손자로서 40년동안 집권하면서도 천문학자로서 높은 명성을 쌓았다. 그는 사마르칸드에 저명한 천문학자들을 모아서 천문대를 세우고 천측표를 개발 십진법, 기하학, 삼각법을 도입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과학발달에 따른 이슬람교의 위축을 두려워한 승려들이 그의 아들을 사주하여 자객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울르그벡은 우즈벡의 세종대왕같은 역할을 하였으며 시, 역사, 신학 등에도 깊은 조예를 가졌다.
바브로 무하마다 (1483-1530)
티무르의 자손으로 유명한 정치가겸 시인
알리세르 나보이(A. Navoi, 1441~1501)
러시아의 푸쉬킨과 같은 우즈벡의 민족문화의 아버지로서 우즈벡어로 된 아름다운 시와 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나바이는 헤라트 출생으로 헤라트의 영주 호사인 바이카라의 궁정에서 여러 관직을 거쳤고, 학문과 예술을 보호하였다. 또한 호레이즘 칸국의 장관으로서 학교, 병원 등을 지워서 서민들에게 인기가 높았으며 문학, 예술인 등을 지원하였다.
또는 그는 우즈벡의 국민시인으로서 함사(Khamsa)라고 불리우는 다섯 편의 시를 남겼다. Confusion of Righteous (1483), Leyli and Medjun (1484), Fafkhad and Shirin (1484), Seven Planets (1484), The Wall of Iskander (1485) 등이다. 우즈벡 국민들은 나보이를 우즈벡 문화의 원류이자 민족 아이덴티의 창시자로 보고 거리, 학교, 도서관 등 많은 시설물에 알리셔 나보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나바이는 또한 타지크어(語)의 저작도 있으며, 문학 이외에 철학괴 언어학 등 다방면의 연구를 행하였고, 또 음악이나 회화에도 능하였다. 현재 우즈베키스탄는 그를 추모하여 예술 극장의 대표적인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2001년 현재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알리세르 나보이 탄생 560주년을 맞아 탄생 기념 축하 행사를 성대하게 준비하고 있다.
비씨나 (980-1037)
정치가겸 의사로서 중세기 의학백과 사전을 집대성하였다.
이슬람 카리모프(I. Karimov)
2001년 현재 우즈벡의 대통령으로써 강력한 독재체제를 구성하고 있다. 개인 직무실은 대내외의 모든 관계를 지휘하여 지방과 내각의 수반들, 그리고 사법부와 경찰조직까지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대통령 이슬람 카라모프는 1938년 사마르칸드시에서 출생하였고 중앙아시아 공과대학에서 기술공학을 전공하였으며, 타쉬켄트 국민 경제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 경제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60년에 '타쉬셀 마슈' 공장에서 기술자로, 1961-66년에는 '타쉬겐트 비행기 조립공단'에서 주임 설계 기술자로 근무하였으며, 1966-83년 사이에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국가계획위원회 과학기술도입 부장으로부터 제1부위원장까지 승진하였다. 그 후 그는 우즈베키스탄 재무부장관(1983-86년), 부총리(1986년) 및 국가계획위원회 의장(1986년) 등에 재임하였다.
정치적으로 카리모프는 1986년 12월부터 1989년 6월까지 카쉬카다르야주 제1서기장을 역임하였으며, 1986년 6월 우즈벡 공산당 제1서기장을 역임했다. 1991년 8월에 모스크바의 쿠데타 발생으로 공산당에 대한 국민적 반발이 높아지자 우즈벡 공산당 서기장을 전격 사임(1991년 8월)하고 공산당을 인민민주당으로 변경한 후 당수로 선출 (1991년 9월)되었으며, 1990년 3월 최고회의에서 간선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 2001년 현재까지 대통령직을 계속 수행해 오고 있다.
독립이전 구공산당 시절 카리모프는 주로 경제 분야에서 일해 왔는데, 이러한 경력은 지금의 국가개입 경제관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브레즈네프 시대의 우즈벡의 보수적인 서기장이었던 래쉬도프의 후광아래 성장해 왔다. 카리모프는 지속적이고 확고한 정치적, 경제적 신념을 갖고 있다기보다는 권력을 추구하는 전형적인 소비에트 관료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공산당이 권력으로부터 멀어진후 그는 우즈벡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강력한 1인 독재정치를 구축하였다.
아트컬 술타노프(A. Sultanov)
1995년 곡물 작황실패의 희생양이 되었던 압둘하쉼 무타로프를 이어 1996년 러시아인인 술타노프가 총리직에 오르게 되었다. 총리직은 전통적으로 거의 권한이 없으나 술타노프는 그나마 전직 총리에 비해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는 전직 대외경제관계부 장관이었다. 비록 술타노프가 일부 서방인들에 의해 유능한 행정가로 존경받고 있기는 하지만, 개혁가로 볼 수는 없다.
이스마일 주라베코프(I. Jurabekov)
우즈벡 정치계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은 인물로, 2000년 현재 한때 실각하였지만 여전히 제1부총리직을 맡고 있다. 1995년까지도 대통령 다음으로 강력한 권한을 쥐고 있었으나 1998년도에 한 번 실각하였고 대통령보다 노령이라는 이유로 지금은 영향력을 많이 상실하였다. 주라베코프는 구공산당 시절부터 행정부에서 높은 명성을 쌓아 왔고 대통령처럼 사마르칸드 출신이다. 과거에는 대통령의 분쟁 해결자로 신임을 얻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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