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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말이 필요없다…디지털 무언족<無言族>

하루종일 말이 필요없다…디지털 무언족<無言族>


《누가 그랬던가. 한국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구한말(舊韓末) 동북아의 작은 나라 한국이 세상의 관심권 밖이었을 때 이 말은 ‘은둔의 나라’라는 뜻이 강했다. 이제 교역 규모 12위권인 한국은 더 이상 은둔 국가가 아니다.

하지만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은 고요한 나라에 살고 있다. 삶이 점차 조용해지고 있다.
사람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휴대전화기 문자메시지, e메일과 인 터넷 채팅, 메신저 등 디지털 기기로 의사소통을 하며 ‘은둔’한다.

 
친구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직장에서도 메신저로 동료들과 대화한다. 출퇴근 길에는 아이팟으로 미국 드라마를 보고, 집에서는 인터넷 게임을 하다 보니 목청 을 울리며 소리를 내는 시간이 크게 줄었다. 디지털 기기로 무장한 ‘디지털 무언
(無言)족’에게 목소리는 과거의 유물 취급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40대까지 회사서 몇마디만 던지고 ‘끝’

▼무언족, 얼마나 확산되고 있나▼

회사 근처 원룸에서 혼자 사는 조 씨가 하루에 만나는 사람은 대략 10명. 하루 동 안 직접 말하는 시간은 1∼2시간 정도다. 사내 회의나 거래처 관계자와의 통화 등  업무와 관계된 일이 전부다. 개인적 의사소통은 대부분 디지털 기기를 통해서 하 고 퇴근 후 역시 휴대용 멀티미디어 플레이어(PMP)나 MP3플레이어 등으로 시간을 보낸다. ‘대화를 하되 말은 하지 않는’ 이러한 현상은 20, 30대 젊은 직장인에 게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40대인 한국관광공사 정보시스템 운영팀의 김경태 과장도 디지털무언족 중 한 명 이다. 업무상 하루에도 여러 명과 대화해야 하는 김 과장은 대부분의 의사소통을 문자메시지나 e메일로 처리한다. 김 과장은 “직접 만날 필요 없이 서로 필요한 사항들만 확인하니 일 처리 속도가 빨라졌고 시간적 여유가 생겨 더 많은 업무를 할 수 있다”고 얘기했다.

말을 하지 않아 인간관계가 더 돈독해진 사례도 있다. 정보기술(IT)업체인 ‘신흥 산업’의 김정택(46) 상무는 최근 인터넷 메신저로 사원들의 고민 상담을 해 주고  있다. 하루에 사원들에게 직접 말을 하는 시간은 30분도 안 된다. 업무와 관계된  사항부터 결혼, 육아 문제 등 개인적인 고민까지 온라인상에서 얘기를 나눈다는 김 상무는 “얼굴을 보지 않고 얘기할 수 있어서 사원들이 부담을 덜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서강대 전상진(사회학) 교수는 “디지털무언족은 언어를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 라 자신을 나타내는 표현 수단으로 여긴다”고 분석했다. 디지털상에서 이뤄지는 대화는 쌍방향성이 아니라 일방향성이 되기 십상이다. 이들은 ‘내 할 말은 이것 ’이라는 식으로 문자로 이야기를 던져 놓을 뿐이다. ‘나는 할 말을 다 했다’는  식으로 행동하면서 책임을 지지 않는 개인주의적 대화법이 지배적이라는 게 전 교수의 분석이다. 목청을 울리는 아날로그 대화가 서로를 잇는 ‘선’과 같다면 디지털무언족의 문자 대화는 수많은 ‘점’들이 불연속적으로 퍼져 있는 형태와 비슷하다. 이 때문에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대량 의사소통이 가능하며 이를 즐 기기도 하지만 ‘군중 속의 고독’을 느낄 개연성도 커진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