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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 - 사마르칸트

1. 개요

 

사마르칸드만큼 실크로드의 낭만을 불러일으키는 이름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마르칸드는 아틀란티스(Atlantis)처럼 신비로운 것이며 팀북투(Timbuktoo)처럼 멀리 떨어진 전설적인 것이다. 티무르 제국의 웅장하고 보다 큰 생생한 기념비인 사마르칸트에서 총천연색 시장과 길고 풍부한 역사가 특이한 형태의 마술같이 작용하고 있다.


사마르칸드는 실크로드의 중심으로서 고대 호레즘시대부터 마라칸다로 알려졌고
, 중국에서는 강국(康國)이라고 불렀다. 기원전 5세기경 제라프샨강 유역에 살던 소그드인들은 오아시스가 있는 아프라시아프 언덕에서 도시를 건설했다. 그후 사마르칸드는 수많은 민족의 침략과 지배를 받아왔다.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기원전 4세기), 아랍인의 침략에 의해 세워진 사라센제국(8세기), 칭기즈칸의 침략(13세기) 등으로 이 도시의 주인공은 바뀌었다.


14세기에는 티무르 왕조가 몽골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된 사마르칸드를 다시 부활시켰다. 티무르는 이 도시를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기 위해
원정을 떠나면 닥치는대로 그 지역의 유명한 예술가와 건축가들을 끌고 와 아름다운 도시로 꾸미도록 지시했다. 특히 그는 푸른색을 좋아해 사마르칸드를 푸른도시로 만들었다. 이런 이유로 사마르칸드를 '푸른 도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도시 곳곳에 산재한 중세 모스크와 왕족들의 묘들이 저마다 푸른색 돔을 머리에 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푸른색은 청록 빛깔의 터키석 장식이 연출해 내는 신비감의 근원이기도 하다. 이슬람 학자들은 사마르칸드를 '동방세계 이슬람의 진주'로 불렀다.

사마르칸트에서 가장 유명한 대부분의 유적들은 14, 15세기에 사마르칸트를 중앙아시아의 경제, 문화, 학문의 중심지로 만든 티무르와 그의 손자 울루그벡, 우즈벡 샤이바니드인의 작품이다. 거의 모든 명소가 그 구조가 옛날과 다르게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구시가에 위치하고 있다. 사마르칸트의 자랑거리이자 중앙 아시아에서 가장 경외심을 일으키는 것은 수많은 마졸리카 도자기, 담청색 모자이크, 거대하고 아름답게 분할된 공간을 제공하는 메드레사를 가리는 웅장한 종합작품인 레기스탄(Registan)이다. 옆에 있는 대규모 집회를 할 수 있는 비비-하님 모스크사원(Bibi-Khanym Mosque)은 티무르 제국의 보석같은 곳이었으며 황폐하더라도 힘이 넘치고 빈틈이 없다. 이 사원은 이슬람계에서 가장 큰 사원의 하나였으며 한계상황까지 건설기술을 추진했기 때문에 그 자체의 웅장함에 희생되어 수세기동안 서서히 기울어져 1897년 지진으로 마침내 붕괴되고 만다.

사마르칸트에서 가장 감동적인 곳은 대부분 티무르와 울루그벡 가문과 총신들에 속한 무덤 거리인 샤히-진다(Shahi-Zinda)로 그중 하나는 많은 존경을 받던 예언자 무하마드의 사촌의 무덤이라고도 한다. 현재 약간 손상되었지만 이 무덤은 가장 아름다운 마졸리카 타일작품으로 장식되어 있다. 사마르칸트시에서 가장 생기있는 곳은 비비-카님 모스크사원 주변의 주요 시장거리이다. 활기찬 다양한 주요 농산물 시장이 정기적으로 열리는 바벨탑(Tower of Babel)으로 이 지역에 사는 모든 민족들이 몰려들어 다채로운 옷과, 숄, 모자, 터번을 쓴 사람들로 가득하게 된다.


사마르칸드는 현재 사마르칸드 주(州)의 주도(州都)로서 인구 약 40만 명으로 우즈베키스탄 제2의 도시이다. 공업 및 문화의 중심지로서 사마르칸드는 자랴프샨 강(江)의 계곡과 구릉에 걸쳐 위치하며, 타쉬켄트에서 자동차로 3시간 가량 걸린다. 우즈벡 과학원 고고학 연구소, 사마르칸드 대학, 기생충학 연구소, 사마르칸드 시립박물관, 우즈벡 문화·예술사 박물관 등이 있고 교육, 문화의 중심 도시이기도 하다. 사마르칸드 시내에는 많은 사적이 있으며 최근 칭기즈칸의 군대에 의해 폐허가 된 구시가의 발굴이 이루어져, 아랍 침공(8세기) 이전의 궁전 터와 화려한 벽화 등이 출토되었다.

 

2. 아프라시아프 벽화

 

중앙아시아와 한민족의 역사적 교류의 증거물로서 아프라시아프 벽화를 손꼽을 수 있다. 1975년에 알리바움은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과학원에서 발굴 보고서 '아프라시아프 벽화'을 발표하여 전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그는 아프라시아프 벽화를 고증하는 가운데 한민족의 의상을 발견했다고 주장하였다.


"두 사람은 앞에 있는 사신들과 머리장식에서 구별된다. 첫 번째 사람은 머리에 차양이 없는 모자를 씌고 있다. 또한 진주로 장식된 리번이 머리 둘레를 조이고 있고, 머리 꼭대기에는 두 개의 깃털이 꽂혀있다. 그의 머리는 짧고 검은색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얼굴은 밝은 색을 띄고 있다. 세부적으로 그림을 연구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레몬색의 옷자락이 긴 옷을 입고 있다. 그리고 그 옷은 허리에 넓고 검은 띠로 주름이 잡혀있다. 밑으로 내려가서, 넓쩍다리에는 옷이 왼쪽으로부터 오른쪽으로 몸을 감싸면서 좁혀져 있다. 가벼운 비단으로 만들어진 넓은 바지는 부드러운 주름을 타며 복사뼈까지 내려져 있고 끝에는 줄로 묶어져 있다. 단화는 부드럽고 앞 끝이 댕겨져 올라가 있다. 손은 넓은 소매에 감추어져 있으며, 선물은 보이지 않는다. 넓쩍다리 부분에는 왼쪽 방향으로 곧바로 꽂힌 칼이 있다. 칼집 위로는 하트모양을 가진 두 개의 고리가 있는데, 이는 칼을 고정시키기 위해 허리에 있는 검은 띠와 두 줄로 연결되어 있다. 두 번째 사신도 똑같은 옷을 입고 있다. 그의 옆 얼굴은 밝은 갈색을 띄고 있으며, 코는 약간 낮다."


알리바움은 이 사신들의 새깃털이 꽂힌 머리 장식을 보고 이들의 국적을 고구려인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 당시 한민족이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왕래를 했다는 것은 매우 감격적인 사건이다. 이 당시에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인 또한 당과 실크로드를 통한 많은 교류를 하고 있었다. 한국의 고려시대는 국제무역이 매우 발달하여 멀리 아라비아 상인들이 고려를 방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3. 주요 관광 지역

 

ㅇ 레기스탄(Registan) 광장

3개의 메드레세로 둘러싸여 있는 레기스탄 광장은 오늘날 가장 뛰어난 동양 건축물의 집결체로 꼽히고 있다. 메드레세는 중세 이슬람의 신학교를 말하며 레기스탄은 '모래 광장'을 의미한다. 메드레세는 신학과 함께 천문학, 철학, 역사, 수학, 음악 등을 연구하는 종합대학의 역할을 수행했다. 레기스탄에서는 과거 왕에 대한 알현식, 공공집회가 열렸다. 이 광장은 15세기 및 17세기에 두개가 더 증축되어 이슬람 종교 건축물인 울르그벡 마드르샤(좌), 시르도르 마드리샤(우), 티라카리 마드리샤(중앙)에 둘러 쌓여 있다. 현재도 레기스탄 광장에서는 매년마다 대통령도 참석하는 '빛과 소리의 제전'을 여는데, 여기서 티무르 제국의 사라진 영화를 볼 수 있다.

 

ㅇ 울르그벡 메드레세(Ulugbek Madrassah)

3개 건물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며, 티무르 손자 울르그벡에 의해 1417년 건축 개시하여 1420년에 완성되었다. 주로 이슬람 신학 대학으로 천문학, 철학, 수학 연구소로 사용되었으며 티무르 제국의 학술 연구의 근원지였다. 입구 문에는 "학예를 연마하는 것은 모든 이슬람 국민의 의무"라고 쓰여 있다. 지진과 18세기 초의 전쟁 등으로 입구의 돔 등 부분이 파손되었다.

 

ㅇ 시르도르 메드레세(Sher-Dor Madrassah : '용맹한 사자'라는 의미)

티무르 제국 이후 이 지역을 통치한 우즈벡 영주인 야한그도르에 의해 1619-1636년에 건설되었다. 현관에는 아기 사슴을 쫓는 사자와 태양처럼 빛나는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본래 이슬람교에서는 우상숭배를 부정하여 기하학적 문양이 기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메드레세 내의 그림은 영주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인간과 동물의 모습을 담게 했다고 한다. 현재 우즈벡에서 통용되고 있는 200숨 짜리 지폐 도안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ㅇ 티라카리 메드레세(Tirakari Madrassah : '금색으로 입힌'이라는 의미)  

야한그도로 바하도르 영주에 의해 1647년 건설 시작되어 1660년 완성되었다. 이슬람 대학과 종교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다.

 

ㅇ 구르에미르廟 (Gur-Emir : '지배자의 묘'라는 의미)

티무르 왕이 1404년 손자(마흐무트 술탄)의 전사를 추도하기 위해 지은 청색의 중세건축 양식의 사원 건물로서 티무르 일족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티무르는 스승을 존중하여 자신의 묘보다 스승의 묘를 더 크게 만들도록 유언하였는데, 이에 따라 구르에미르에서 제일 큰 묘는 티무르 스승의 묘이다. 돔의 하부 벽에는 코란의 문구가 문양화되어 "알라는 위대하다"라는 글이 씌여져 있다. 푸른 타일로 화려한 모양이 장식된 돔은 64개의 나무가 내장되어 골격을 유지하고 있으며 세로로 무수한 흠이 조각되어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돔의 축조 기술은 티무르 시대에 창조되었으며 사마르칸드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묘의 내부에는 티무르 자신과 아들, 손자 및 스승과 당시 지도자들의 석관이 있다. 티무르의 묘는 연옥으로 만들어졌으며 흑녹색을 띄고 있다. 유해의 머리는 모두 메카를 향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유해들은 돔의 지하에 안치되어 있다. 1941년 학자들이 이 무덤들을 개봉해 조사한 결과 티무르가 전투중 입은 부상으로 불구가 됐고 울루그벡은 목이 잘려 암살당했다는 사실이 유해를 통해 증명됐다.

 

ㅇ 비비하님 마스지드(모스크)

비비하님 모스크는 중앙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비비 하님은 티무르의 8명 아내 중 그가 가장 사랑했던 왕비의 이름이다. 비비 하님을 위해 짓도록 했다는 이 모스크는 티무르 사후 3년째 완성됐기 때문에 정작 티무르 자신은 이 장엄한 예술품을 보지 못했다. 현재 과거 파괴된 부분을 개보수하고 복구작업에 들어가 있는데, 재정 지원이 되지 않아서 완공 일자가 늦추어지고 있다.

 

ㅇ 샤히진다 (Shahizinda : '살아있는 왕'이라는 의미)

8세기 아랍 침입 이후 형성된 이슬람교도들의 묘지로 주로 14-15세기간에 걸쳐 11개의 묘를 건설하였다. 예언자 마호메트의 사촌 쿠삼(Kusam)과 티무르 일족, 울르그벡의 은사, 자녀 등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샤히진다 내부의 첫번 째 푸른 돔이 있는 건물이 울르그벡 일족의 묘이며, 계단 끝 왼편에 푸른 빛 아라베스크 모양의 묘가 조카 딸 샤드무르크의 묘이다. 푸른 색 모자이크 타일이 매우 인상적이다. 사마르칸드 사람들은 지금도 푸른 빛의 아름다운 영묘에 찾아와 기도를 드린다.

 

ㅇ 울르그벡 천문대

  1428-1429년에 걸쳐 티무르 손자인 울르그벡에 의해 건축되었으나 그의 사후 내분에 의해 일부분이 붕괴되었다. 현재 천문대의 기본 골격과 6각형 천체관측기의 지하 부분이 남아 있다. 당시에는 거대한 대리석으로 높이 40m의 관측 돔이 있었다. 태양, 달, 행성의 고도를 정밀하게 측정하고 지구의 위치, 시간을 결정하였으며, 당시 측정한 1년은 실제 기간과 1분 정도의 차이밖에 없었다고 한다. 울르그벡은 티무르의 손자이자 위대한 학자, 천문가, 정치가였다. 특히 그가 이룩한 천문학적인 업적은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될 만큼 뛰어난 것이었다.
울루그벡이 세웠던 천문대는 20세기 들어 발굴됐는데 당시 페르시아 등지에서 저명한 천문학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거대한 규모의 육분의(별들의 거리를 측정하는 기구)를 통해 놀랄 만큼 정밀한 천문관측이 이뤄졌으며 이 성과는 17세기 유럽으로 전파됐다. 현군 울루그벡이 암살당한 이유가 이같은 그의 학문중시정책 때문이라는 것을 못참는 승려들의 사주를 받은 그의 아들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당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우즈벡 역사 예술 박물관(Museum of Uzbeck History, Culture and arts)

1874년에 설립되어 약 10만 여종의 문화재를 소유하고 있다.


3. 교통

 

타쉬켄트와 사마르칸트간에 매일 비행기가 운항된다. 그렇지 않으면 건조한 평지인 '헝그리 스텝(Hungry Steppe)'을 가로 질러 5시간동안 버스나 기차를 탈 수 있다. 버스가 사마르칸트, 타쉬켄트, 부하라, 두샨베, 알마타에서 운행된다.